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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김훈이다. 그 분의 글을 보다보면 전율을 느끼기 까지 한다. '칼의 노래' 첫머리의 충격은 아직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김훈은 해가 먼 섬부터 지고 먼 섬부터 뜬다는 얘기를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세상에 돌려보내진다고 표현했다. 이 소설을 통해 나의 짧고 어리석은 눈이 떠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난 의미 중심적 사고였다.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면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짧고 쉽게 상대방에게 의미가 전달될 수만 있다면 다른건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을 보고 나서 그런 내 생각의 천박하고 무미건조함을 알게 되었다. 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그 후 난 김훈의 소설을 찾아서 읽게 되었다. 

최근에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다. 이 글의 제목을 보면 단순한 자전거 기행문이란 생각이 드는데 이 글은 강산 예찬론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압권은 냉이된장국의 치정 관계에 대한 글이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삼각은 어느 한족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입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이 평화 속에는 산 것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힘이 들어있다.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란 흔치 않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 있다."

인간과 된장, 냉이가 삼각 치정관계를 이루고, 이러한 치정관계가 냉이된장국 속에서 어우러진다는 글은 관찰과 통찰의 훌륭한 결합으로 손색이 없다. 감히 그 경지를 가름할 수 없다고나 할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가장 최근에 보게 된 김훈의 글은 '개'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참 밝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단 뜻이다. 개의 삶이 밝을 순 없을게다. 사람에게 매인 개의 신세가 어찌 좋을 수만 있겠는가. 그렇지만 보리(개의 이름)는 참 쿨하게 생각한다. 개로 태어나 너무나 바쁘고 신바람 나고 공부할 것도 많아서 슬픔 따위에 오래 매달려 세월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는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어른이 되어서 저 혼자의 힘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어른 개가 될 수 없어. 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어렸을 때는 더 바빠.



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해. 개는 우선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그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해. 그리고 눈, 코, 귀, 입, 혀, 수염, 발바닥, 주둥이, 꼬리, 머리통을 쉴새없이 굴리고 돌려가면서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노리고 물고 뜯고 씹고 핥고 빨고 헤치고 덮치고 쑤시고 뒹굴고 구르고 달리고 쫓고 쫓기고 엎어지고 일어나면서 이 세상을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지."

보리는 참 쿨한 개이다. 삶이 비루할지언정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이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웅변하는거 같다. 행복은 그런거다. 내가 처한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은 결정된다. 행복을 느끼는 요인의 반은 타고난다고 한다. 타고난 성품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게 결정된다는 거다. 나머지 반중 5분의 4는 후천적으로 학습된 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5분의 1만이 환경 그 자체에 의한 영향이라 한다. 보리처럼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자세도 참 좋겠다 싶다.

개가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한 동사를 나열하는걸 보면 참 대단하다 싶다. 19개의 동사로 몸으로 받아내는 방식을 병렬적으로 나열한게 눈에 확 와닿았다. 어쩜 저런 많은 동작을 찾아 내었을까. 작가가 두달 가까이 진도에서 개를 관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나는 되도록이면 싸우거나 달려들지 않고, 짖어서 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람들의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 개의 도리이다. 또 쓸데없이 싸우다가 다치지 말고, 기어이 싸워야 할 때를 위해서 몸을 성히 유지하면서 힘을 모아두어야 한다. 사람 동네에서 개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짖는 소리에는 위엄과 울림이 있어야 한다. 짖을 때, 목구멍에서 놋사발 두들기는 소리가 깽깽깽 나오는 개는 별 볼일없는 개다. 소리가 목구멍까지도 못 내려가고 입 안에서 종종대는 개는 그보다도 못하다.

짖을 때, 소리는 몸통 전체에서 올려나와야 한다. 입과 목구멍은 다만 그 소리에 무늬와 느낌을 주면서 토해내는 구멍일 뿐이다. 몸 속 전체가 울리고 출렁대면서 토해지는 소리가 진짜 소리다. 소리는 화산처럼 터지면서 해일처럼 몰려가야 한다. 나는 짖어야 겠다 싶으면 몸 속 깊은 곳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그때 내 몸 전체는 악기로 변하는데, 이 악기는 노래하는 악기가 아니라 싸우려는 악기다. 악기가 무기인 것이다.

소리는 깊게 울리고 넓게 퍼지면서 무시무시한 겁을 주어야 한다. 그런 소리가 나와야만, 내 소리를 듣는 사람이나 짐승들이 내가 지금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온몸의 힘으로 뛰쳐나와 들어붙을 자세를 갖추고 있음을 알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다."


힘있고 명징하게 쓰여진 글이다. 이 글을 보면 간결하고 무게있는 글로 싸움의 준비와 기세를 보여주는 칼의 노래를 보는 듯 하다. 김훈 글의 비장미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정리하면 개의 눈을 빌려 유쾌함과 그 뒤에 숨어있는 아픔을 함께 보여주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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