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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이번에는 김훈님의 단편소설집인 강산무진(江山無盡)이다. 이 소설집에는 배웅, 화장, 항로표지, 뼈, 고향의 그림자, 언니의 폐경, 머나먼 속세, 강산무진 등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과 이별이다. 이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낸 소설이 '화장'과 '강산무진'이다. '화장'에서는 뇌종양으로 투병하는 아내와의 죽음을 통한 이별이 그려진다. '강산무진'에서는 대기업 이사가 간암판정을 받고 주변을 정리하고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 두 소설을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겠다.

'화장'은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아내, 주인공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햇빛처럼 환연한 몸을 가진 부하 여직원 추은주, 아내의 장례와중에도 화장품 광고시안을 결정해야 하는 화장품회사 상무인 화자의 세가지 결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함께 할 수 없는 고통속에 죽어가는 아내의 육체의 메마름과 젊음으로 빚어진 추은주 육체의 풋내음으로 대비되어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김훈 특유의 탐사정신에 기반한 화장품 회사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도 함께 나오게 된다. 

"숨이 끝나는 순간, 아내의 몸속에 통증이 있었다 해도 이미 기진한 아내가 아픔을 느낄 수 없었고 아픔에 반응할 수 없었다면 아내의 마지막이 편안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투통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에 잠겨 신음을 하여도 그 고통의 깊이를 타인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고통을 바라보면 느끼는 아픔으로만 그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모든 닿을 수 없을 것들을 사랑이라 부르고,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추은주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화자의 마음이 곧 우리네 마음일 것이다. 원하고 사랑하여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마음으로만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삶 말이다.

배우자의 사망이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우리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배우자와의 영원한 헤어짐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평생 살을 맞닿으면서 온기를 나누어오던 반려자를 가슴으로만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이 있을까. 나는 두렵다, 그러한 상황이 나에게 닥쳐 오는게.

'강산무진'은 배우자의 사망이 아니라 말기암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몇 달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이다. 미국으로 떠난 주인공에게 죽음을 앞둔 막막한 삶이 기다리겠지만 받아드리지 못할 인생도 없을 것이다. 이 땅을 떠나는 삶이 허무하겠지만 그것을 받아드려야 할 운명이라면 받아드려야 하는 것도 인생이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아득하고 가없는 산과 강들이 눈 아래로 흘러갔다. 비행기가 동해에 가까워지자 산과 강이 끝나는 저쪽에서 안개처럼 뿌연 바다가 보였다. 날이 흐려서 바다는 잿빛이었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빛의 다발이 눈 덮인 먼 산들 위에 얼룩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산무진도>는 살아 있는 내 눈 아래 펼쳐져 있었고 그 화폭 위쪽, 산들이 잔영으로 스러지고 바다가 시작되는 언저리에서 새빨간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이 바람에 날리는 환영이 보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 세상을 떠나 럭키스트라이크의 색깔로 기억되는 나라, 미국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남자다.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 그 새로운 곳에서 또 다시 영원한 여행을 준비하는 남자. 남자의 여행의 끝은 어디인가. 사람이 굳건하게 붙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큰 질곡이 없이 담담하게 흘러가는 이 두 소설은 나의 미래일 수 있는 이야기로서 소설속에 있는 글들이 단지 종이위에만 있는건 아니었다. 그 글은 내 가슴 한가운데에서 함께하는 듯 하다.

이 글들이 나에게 깊게 와닿는건 나도 이글에서와 같은 죽음과 이별을 염두에 두고 예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나이가 이미 40대후반이 되었기에 현실이란 대지에 굳건하게 서있으면서도 미래를 바라보고 다가올지도 모르는 거친 운명을 받아드릴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은 내 인생의 절정이다.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존중과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여러가지 부족한 점도 많지만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믿는다. 난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어려움 속에도 살아왔고 그게 나의 강점이란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와 내 주변은 계속 바뀌어 나가고 있다. 미세하고도 긴 변화이기에 내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할 따름이다. 이젠 미래가 나의 의지로만 개척될 수 있는건 아니다. 나의 의지로 부터 유리되어진 내 주변에 대해서도 예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 소설은 나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를 우리네 인생처럼 메마르게 보여준다. 우리네 삶에 가깝게 보여주기에 이 소설이 나에게 주는 메세지는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강산무진이 나에게 던져준 화두를 나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나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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