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시대의 유명한 작가 박경철. 시골의사란 필명으로 잘 알려진 박경철은 안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로서 인터넷을 통해 유명해진 주식투자 전문가이면서 사회운동가이다. 박경철의 글은 독자의 눈높이에 잘 맞출 줄 알기로 이름이 나있어 인기가 있다. 또한 많은 독서에서 나오는 내공으로 깊이가 있는 글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이번에 읽은 책은 자기혁명이란 책이다. 이 책은 일종의 수필집으로 보면 된다. 제목에서 보듯이 감성적인 수필집은 아니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짜여진 수필로 보면 된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응시의 힘
응시는 사물을 스쳐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매일 무심히 걷던 산길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때 그 길은 더 이상 어제의 그 길이 아니다.
초가을 이맘때면 봉정사를 찾는다. 안동에 사는 재미다. 주중에는 호젓한 저녁시간을 만들지 못해 아쉽지만, 토요일 오전이나 늦은 저녁 봉정사에 가면 사람 대신 바람이 마당을 쓴다.
인적이 없는 산사는 적요하다. 은행잎을 훑어내린 바람이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스치고 지나가며 억겁의 세월을 일깨운다. 이른 아침이면 떨어진 낙엽에 제법 물기가 돌지만, 언제 태어났는지 모를 그 바람이 금세 습기를 말려 버린다. 바람은 그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리저리 희롱하며 보이지 않는 법(法)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산길을 걸으면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차를 타고 오르면 빽빽하게 하늘을 가린 소나무숲에 눈길을 빼앗기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로 몸을 옮기면 땅에 시선이 머무는 탓이다. 걸으며 보는 것과 달리며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
걸으면서 만나는 것은 생명이다. 몇날 며칠 차곡차곡 재워져 습기가 가득 찬 낙엽들 사이로 이름 모를 생명이 꿈틀거린다. 밤새 낙엽에 의지해 찬 이슬을 피하다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햇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 그 생명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백척간두, 아슬아슬한 생사의 경계에 맞닥뜨린다. 우리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날 때쯤 가장자리로 내려서면 아래쪽으로 작은 계곡이 보인다. 그 순간의 물소리는 다르다. 찻길과 달리 소음이 개입되지 않아서다. 소리를 듣기 위해 계곡으로 몇 걸음 더 내려서서 길가에 쪼그리고 앉으면 ‘후드득'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밤새 지탱해온 이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나뭇잎이 허리를 숙여 흘려내리는 소리다. 물방울은 바닥에 떨어진 다른 나뭇잎의 등위에 떨어진다.
나무는 가을을 준비한다. 여름 내내 한껏 빨아들인 물을 몸에 담고, 광합성의 문을 닫아 거는 것이다. 나무는 잎을 떼어내고, 제 한 몸 감당하기도 벅찬 잎들은 몸에 묻은 물방울을 떨어낸다.
마침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 본다. 낙엽들이 꽃잎처럼 쏟어져 내린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비한다. 봄이면 나무는 다시 새 잎을 낼 터이고, 그렇게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고 했다. 나무와 나뭇잎, 이슬방울 하나까지 부처의 법이 스며 있다. 장엄한 광경이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머물지 않고서는 차마 엿볼 수 없는 광휘(光輝)이다.
이 순간, 잊고 있던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들릴락말락 투둑거리는 나지막한 소리가 온 숲을 흔든다. 문득 인간의 주파수가 아닌, 부처의 귀로 듣는 소리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떨어진 낙엽들이 땅과 만나는 소리다. 낙엽은 아쉽게 아쉽게 허공을 맴돌다 겨우 바닥에 내려 앉는다. 머물던 저 높은 나무 위를 떠나 처음으로 바닥에 닿는 것이다. 그 느낌은 어떨까? 앞선 동료들을 만난 반가움이 앞설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기라도 할까?
아무리 쳐다봐도 아쉬움은 보이지 않는다. 서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대자연의 질서에 몸을 맡긴 구도자의 물색이다. 모태를 떠나 연기(緣起)의 수레바퀴에 몸을 실은 수백 수천의 낙엽이 하늘을 수놓은 장면은 아름답지만 처연하고, 장엄하지만 통쾌하다.
추락하는 것은 대개 슬프지만 이때의 낙엽들은 아름답다. 인간은 질서를 거슬러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 하지만, 자연에는 역리(逆理)가 없다. 태어난 것은 스러지고, 매달린 것은 떨어진다. 하늘은 내리고 땅은 키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질서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내가 그만큼 역리와 배율(排律)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응시는 사물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광고인 박웅현 씨는 '일상의 들여다보기'를 통해 창의성을 키울 수 있다 했다. 일상의 들여다보기를 통해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응시할 때 기존의 시각으로 파악되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 이러한 발견이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상의 흐름속에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이야기 하지만 기실 우린 사물과 일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다. 모든걸 알고 있는듯한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걸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미처 느끼지 못한걸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웅현씨는 창의성의 개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릴 때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 걷는 데 천재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도 넘어지면서 일어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려고 해서 이룬 일이다. 실패를 하고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그 실패마저도 즐겁다. 성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운 기회였기 때문이다. 에디슨 식으로 말하면, 천재란 2,000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창의성은 2,000번을 실패한 뒤에 얻을 수 있는 빛과 같은 것이다."
"많은 말에는 반드시 득과 실이 있다.
아무리 표현의 시대라고 해도 말에는 질서가 있고 설득의 힘이 깃들어야 한다. 어떤 말이든 입 밖에 낼 때는 두번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한 마디를 하면 내 머리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데, 이는 말은 원래 주고 받는 것으로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면 반드시 실언을 하게 된다. 언어의 순발력은 속도가 아니라 효용성이므로, 생각이 언어로 바뀌어 입으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걸러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말에서 중요한 첫번째 덕목은 호흡인데, 호흡을 고르기 위해서는 대화 도중 말을 하고 싶을때 딱 2초만 쉬면 된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은 실수를 할 것이고 나는 2초간 호흡을 고르면서 내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제거할 수 있다. 설사 그 과정에서 발언 기회를 잃는다고 해도 나중에 상황을 더 잘 파악해 좀더 정리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두번째는 설득력이다. 나는 과연 그를 설득하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과시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말로써 부족함을 달래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말을 하는 이유가 타인에게 내 뜻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원래 말의 목적은 설득이다. 즉 말의 대상은 타인이다. 타인은 나만큼 나에게 관대하지 않고 늘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이 보는 나의 인상은 순간의 실수로 뒤집힐 수 있다.
인간은 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지만 타인은 언제나 불안의 원인이다. 이런 불안은 상대를 알아갈수록 줄어들지만 문제는 그 안다는 사실의 정확성이다. 그가 나를 안다고 생각하면 나에 대한 그의 불안은 옅어지겠지만, 사실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의 무의식은 나에게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고자 분주할 것이고 그 분주함의 대상이 바로 나의 말이다. 3년을 사귄 연인이 단 한 마디 말로 헤어질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말의 신중함은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말을 시작하는 타이밍을 늦추는 것이다. 한 번 늦춤으로써 정제되고, 한 번 늦춤으로써 신중함을 인식시키고, 한 번 신중함으로써 한번의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세번째 덕목은 분노를 다르는 것이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일에 대해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분노의 상대를 확실하게 적으로 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한번 숨을 고르고 상황을 돌아본 후, 다음 국면에서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다.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면 나에게 가해지는 공격의 발톱도 무텨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대응은 물처럼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네번째는 진실성인데, 말의 앞뒤가 일관하고 논지가 바로 서 있으며 실수는 바로 인정하는 것이다. 말이 진실하려면 겸허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겸양의 자세로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섯번째는 평가를 자제하는 것인데,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특히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히 주의해야 한다. 타인의 단점을 장점보다 먼저 지적하는 것은 상대방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 자신의 경박함을 드러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사적인 영역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를 경솔히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먼저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가 누군가를 쉽게 평가하면 다음부터 가능한 한 그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
여섯번째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논지를 중언부언하거나, 사족을 다는 일은 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지름길이다. 기술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말을 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내가 평소에 많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다. 대화중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 보다 내가 평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서는 듣기만 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있는 부분에서만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말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옛말에 세치 혀가 만화의 근원이라 하였다. 입을 통해 우린 많은걸 얻을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기에 경계하라는 얘기이다. 말을 조심하여 화를 피하는 한편, 말을 통해 나의 품격을 높이고 나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기에서 얘기되어진 덕목들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자기 삶의 혁명가가 돼라.
스스로 혁명가가 될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혁명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슴없이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것을 타파하는 행동이 나를 혁명가로 만든다.
실제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대하는 자세 혹은 태도다. 우리는 대개 성과의 차이가 능력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태도의 차이, 즉 집중력의 차이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꿈과 현실의 거리를 느끼는 순간,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를 먼저 떠올린다.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와 환경, 여건 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적 요인은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한 다음에야 거론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적인 요인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신과 육체와 시간을 갉아 먹는 것들이 널려 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야 하는 나그네가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대달고 가는 것과 같다. 먼 길을 떠날 사람에게 필요한 애티투드는 최대한 단출한 짐을 차리는 것이다."
현재 자신을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고 새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갈 때 혁명을 경험한다 말할 수 있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 집중해서 일을 다룰때 우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외적요인을 탓하면서 자기변명을 하기 보다 최선을 다하여 자기 한계를 초월하고자 노력할 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을 감동시켜야 진정한 노력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란 자기의 노력이 스스로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서 쓸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조정래)
나는 일(직업)을 적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일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만약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면(그렇게 선택된 것이라면) 대담하게 행해야 한다. 사람이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성공적인 삶이다.(헤밍웨이) 그 역식 무모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잘 간파하고,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면'이라는 전제 아래 좌고우면하지 말고 앞만 보며 나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즉, 자기가 목표한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물리가 트이고 새로운 인식이 발달하며 그 인식을 새로운 방법으론 실현해가면서 스스로 변화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박웅현 씨는 밥 먹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밥만 먹는 '개처럼 살자'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개처럼 살자'란 구호가 이런 좋은 뜻이 있을 준 몰랐다.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개처럼 살자라고 표현하다니 재미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막연하게 조금 일하고 난 다음에 안된다고 뒤로 자빠지면서 '난 최선을 다했는데 사회(조직)가 문제'라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다. 최선이란 말은 그렇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
"고난에 맞서는 도전은 성장의 과정이다.
하늘이 어떤 이에게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그 근육과 뼈를 지치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데, 이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성질을 단련시키며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잘할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바로 잡을 수 있고, 곤란을 당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은 다음에야 분발하고 상황을 알게 되며, 잘못된 신호가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부적으로 법도 있는 집안은 제대로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외부적으로 적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음에야 우환이 사는 길이고, 안락이 죽는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이 구절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찌릿함을 나에게 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내리실때 우리는 시험을 두려워하지만 그러한 시험을 통해 우리는 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고뇌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참된 인생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난이 닥쳤을 때 원망하여야 할 대상을 찾기 보다 인생의 담금질로 받아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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